뿌리에 대한 이해, 팽팽한 개성 홀리마운틴 [The Holy Mountain]
0. 밴드 타이틀부터... 맷 파이크(Matt Pike)가 가입하며 스토너메탈 사운드를 완성한 밴드 슬립(Sleep)의 두 번째 작품 [Holy Mountain](1992)에서 영감을 얻는 밴드 타이틀부터 홀리마운틴이 추구하는 바는 분명하다. 진짜 스토너/슬럿지 메탈. 헤비메탈의 근간이라 할 블랙새버드(Black Sabbath)를 기본으로 하되, 지난 50여 년 헤비메탈이 완성해온 무거움의 요소를 홀리마운틴 방식으로 다시 세우는 일 말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놀랍도록 완성도 높은 자신의 스토너를 창조한 홀리마운틴의 데뷔작 [The Holy Mountain]을 듣는 중이다. 1. 스토너/슬럿지 메탈 21세기 헤비메탈을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스토너 혹은 슬럿지, 둠 메탈을 변용한 스타일의 확산이다. 그 뿌리는 깊다. 1980년대부터 블랙플랙(Black Flag), COC(Corrosion of Conformity), 멜빈스(the Melvins) 같은 선구자들은 블랙새버드의 광기어린 헤비니스를 하드코어 펑크와 결합하는 시도를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장르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1990년대에 이르러 블랙새버드라는 뿌리를 공유하면서도 지역 씬의 개성을 갖추게 이끌었다. 마침내 스토너/슬럿지는 2000년대 록/메탈의 주요 서브 장르로 발돋움한다. 미국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스토너 계열은 카이어스(Kyuss)와 슬립(Sleep)이라는 강력한 선두주자를 필두로 푸 만추(Fu Manchu), 하이온파이어(High On Fire), 미국 동부의 몬스터 마그넷(Monster Magnet), 영국의 일렉트릭 위저드(Electric Wizard) 등으로 확산된다. 데저트 록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스토너 사운드는 느리지만 함축적인 리프를 추구한다. 미국 남부에서는 닮은 듯 다른 방식의 음습하고 사악한 슬럿지 계열 밴드들이 나타났는데, 느리고 크게 굽이치는 서던 그루브를 담은 아이헤잇갓(Eyehategod), 크로우바(Crowbar), 소일런트 그린(Soilent Green)가 밴드들의 밴드로 자리한다. 판테라(Pantera), 아이헤잇갓, 크로우바, COC의 호화 라인업이 뭉친 다운(DOWN)은 이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기도 했다. 스토너/슬럿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일 뿐 아니라 펑크, 데스메탈, 포스트록, 프로그레시브메탈 등과 끊임없는 콜라보를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헤비니스 씬에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일례로 뉴로시스(Neurosis)는 스토너에 하드코어 펑크를 창조적으로 더하는 식으로, 스웨덴의 컬트 오브 루나(Cult of Luna)는 슬럿지에 데스메탈을 해체적으로 더해 포스트메탈의 선구자가 되었다. 피그 디스트로이어(Pig Destroyer)는 그라인드코어를 스토너로 재해석해 아방가르드 메탈을, 배로니스(Baroness)와 마스토돈(Mastodon)은 스토너를 기반으로 프로그레시브 헤비니스 사운드를 주조해냈다. 2. 홀리마운틴 스토너/슬럿지는 현재 세계 록/메탈 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서브 장르일 뿐 아니라 새로운 도전자들이 가져오는 창조적 시도를 받아들이며 쉼 없이 변모하는 중이다. 블랙새버드라는 선조로부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동시에 (변화에 열린 태도에서) 가장 젊은 헤비니스 장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 에덴이 원초적 형태를 시도한 바 있으며, 블랙메디신, 넉다운, 투견, 스모킹배럴즈 등이 스토너/둠 메탈을 추구하는 음악을 들려준 바 있다. 홀리마운틴의 음악은 이전 밴드들이 추구했던 둠 성향 일색에서 벗어나 블루지한 기타 연주와 서던 메탈의 강렬한 그루브를 표현하는 둔중한 베이스와 드럼 연주를 통해 스토너메탈의 진가와 매력을 한껏 전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홀리마운틴은 헤일스톰, 스모킹배럴즈에서 활동한 바 있는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서형진, 번 마이 브릿지스와 스모킹배럴즈 출신의 드러머 김요셉, 쉘백과 스모킹배럴즈 출신 기타리스트 조수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멤버는 스모킹배럴즈에서 함께 활동했었다는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그루브메탈, 하드코어 펑크 등 스토너/슬럿지 역사 내내 더해지며 발전의 마중물이 되어준 인접 장르를 연주했던 음악적 뿌리 또한 가지고 있다. 덕분에 홀리마운틴 음악은 서던메탈의 묵직한 그루브와 하드코어의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앨범 전체에 출렁대는 모양새다. 3. 7곡의 개성 황량한 바람 소리로 시작하는 첫 곡 '...at the Mountains of Madness'는 가사부터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광기의 산맥]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기타와 베이스 모두 와와페달을 적극 사용하면서 특유의 그루브를 끌어낼 뿐 아니라, 베이스의 경우는 베이스 신스를 이용한 다양한 사운드 실험을 쏟아낸다. 베이스의 활약은 드럼과 기타가 단단하게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라 할 수 있는데, 덕분에 클리프 버튼(Cliff Burton)이 'The Call of Ktulu'에서 들려줬던 스피커를 터뜨릴 듯한 박진감이 홀리마운틴 스타일로 추구된다. 이 기운은 이어지는 'Promised Land'까지 고스란히 지속된다. 와와페달의 맛깔난 기타 솔로와 베이스 연주는 앨범 전체에 양념처럼 적절하게 감칠맛을 더한다. 'Make My Day'의 솔로와 후반부 블루지한 리프가 기타의 맛이라면 'Sweet Nothings'의 꾸밈음을 살짝 더한 베이스 연주는 곡 전체를 꿀렁대는 그루브의 매력으로 뒤덮는다. 베이스와 호흡을 맞추는 드럼의 단단함은 와와페달을 밟는 베이스 연주 사이에서 묵직한 플로어탐과 탐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Show You My Way'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곡에서는 크래쉬의 안흥찬이 만들었던 그로울링과 중음 샤우트 사이에서 독특한 보컬 스타일을 확장한 서형진의 멋진 보컬도 즐길 수 있으며, 거친 하드코어 스타일 기타 리프에선 밴드의 풍성한 음악적 자양분 또한 양껏 즐길 수 있다. 블루지한 스토너메탈을 최대치의 볼륨으로 키우면 어떤 사운드를 담은 음악이 만들어지는지 'Maximum Overdrive'이 보여준다. 애초에 캘리포니아 팜 데저트 일대에서 시작된 스토너메탈은 사막에 발전기와 엄청난 앰프를 싣고 나가 밤새도록 볼륨을 키운 사운드를 즐기던 문화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No Compromise'는 하드코어와 그루브메탈의 영향력이 공히 느껴지는 곡이다. 속도감 넘치는 리프에 와와페달을 끝까지 밟으며 만들어진 왜곡된 톤의 베이스 솔로까지 1분 50초를 갈아버리는 광폭함이 화끈하다. 끈적한 그루브와 후끈한 톤으로 무장한 드럼, 기타, 베이스의 향연이 7곡에 걸쳐 짙게 펼쳐진다. 고딕과 슬럿지의 묵직한 뉘앙스를 추구하는 팬이라면 '....at the Mountains of Madness'와 'Promised Land'의 원투 펀치를 들으며 감동할 것이다. 하드코어와 스토너가 원초적으로 만났던 초기 스토너메탈을 그리는 팬은 'Show You My Way', 'Maximum Overdrive', 'No Compromise'로 마무리되는 후반부에 열광할 것이다. 클러치(Clutch)나 몬스터 마그넷의 섹시한 그루브가 멋진 스토너를 좋아한다면 'Sweet Nothings'과 'Make My Day'를 들으며 만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한다. 4. ... 입구이자 출구 이 앨범은 한 마디로 스토너 입문의 완벽한 가이드다. 스토너의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을 뿐 아니라, 그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앨범에 담긴 사운드를 기반으로 슬립이나 카이어스, 아이헤잇갓이 들려준 심연을 휘젓는 스토너/슬럿지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의 역할도 한다. 여기에 서던록의 그루브와 클리프 버튼이라는 불세출의 베이시스트가 선보였던 연주를 홀리마운틴 방식으로 해석한 개성이 팽팽하게 담겨있다. 작지만 단단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국 헤비니스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멋진 밴드 홀리마운틴의 쾌작. 스토너/슬럿지 메탈로 향하는 입구이자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는 출구다. - 조일동 (음악취향Y 편집장) |